과일을 깎으면서
과일을 깎으면서
仁塘/
항상 커피 타는 것과 과일을 깎는 것은 남편의 몫이다.
어쩌다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모처럼만에 예쁘게 깎아 드려야지
하면서 과일을 깎는데 남편이 웬일이야 한다.
그때 텔레비전 방송 중에 큰 며느리들의 좌담이 한창인데
나의 귀를 때리며 가슴 한복판에 비수가 꽂히듯이 들리는 말은
둘째 며느리가 제일 얄밉고 얌체란다.
“여보 둘째가 얌체라는데 나도 그래요?” 물으니 남편은 당신도
둘째 며느리니 다를 것 없겠지! 한다.
그렇지 않아도 요사이에 큰형님 생각이 많이 난다. 어쩜
저럴 수가 있을까? 생각을 했는데 얼마나 내가 얄미웠을까?
다음에는 한국에 가게 되면 큰 형님댁에서 같이 지내면서 맛있는
것도 많이 해 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난 둘째 딸 해산 시에 출혈이 심한 탓에 죽다 살아났었다.
남편은 그렇지 않아도 직장동료의 형수님이 해산하다가 세상을 뜬
뒤라 마음고생이 심했었는데 많이 놀랐고, 갈월동에 있는
나는 그 후로 몸이 많이 쇠약했었다.
아이들 고모부는 용산철도병원 앞에서 한의원을 했는데 남편과
함께 다니러 간 나를 억지로 진맥을 보더니 어린아이 맥만도
못하다면서 남편보고 처남댁이 건강해야 처남이 잘살 수 있다며
녹용을 두 재나 지어주었다. 그 바람에 온 식구들이 나의 연약함을
알게 됐다.
시아버님과 시누님 부부가 제일 사랑하는 둘째이기에 덤으로 내가
받는 사랑이 끔찍하다. 거기다 넷째와 막내 시동생까지 가세를 한다.
홀 시아버님에 칠 남매의 둘째 며느리로서 명절이 되면 마땅히
미리 가서 가사를 담당해야 하건만 둘째인 남편이 직장관계로
당일에나 나를 보낼 수 있다고 아버님께 말씀을 드려서 쾌히
눈감아주신다. 그까짓 돈 몇 푼이 대순가? 아이들을 방에 들여
보내고 나오려면 시아버님은 내 손을 잡아 아랫목에 앉히며 춥다고
이불을 덮어주며 부엌에다 대고 얘 둘째 왔다. 뜨거운 국물 좀
가져오라 하신다. 막내 시동생도 형수님 춥지요? 지향 지혜야
춥지 이리와 한다. 큰 형님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래도 반색하는
기색을 하면서 뜨거운 국을 들고 들어온다. 형님 고마워요,
정말 맛있네요 하면서 먹는 둘째 동서가 얼마나 얄미웠을까?
지금 내가 생각해도 정말로 얄미웠을 것 같다. 집안에 무슨
경사 때면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을 쓰면서 생색이나 내고,
시아버님은 노인회 회장님이니 어쩌다가 아버님께서 눈짓을
보내면 두부에 돼지고기를 듬뿍, 얼큰한 고추장 찌게 한 솥을
끓여서 용돈 몇 푼 드리고 집을 비워 드리면 노인장이 된다.
그 바람에 둘째 자부의 값이 올라간다.
그 당시에 월남치마라는 것이 처음 나왔을 때다. 나는 동대문
시장에 가서 자투리 천을 사서 만들어 입으면서도 큰 형님은 좋은
것으로 사다 준다.
생사 내의가 처음 나왔을 때도 큰형님은 새빨간 색으로, 조카들도
생일이 되면 털옷을 선물하면서도 우리 애들은 자투리 실을 사서는
여러 겹을 혼합해서 시누님께 가서 배우면서 짜 입히고 옷도 만들어
입혔었다.
애들 고모부도 나만 가면 잘 먹어야 된다며 닭찜을 해라 차돌
배기를 사오라 하며 챙겨준다. 큰형님은 얼마나 마음이 섭섭했을까?
내가 이민 올 때에 한 말이다. 아버님한테 야단맞지 않은 며느리는
자네뿐이며 큰 동서로서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산 것도 자네 한
테뿐인데 그래도 떠난다니 많이 아쉬울 거란다.
이년 전에는 시누님 편에 연락이 왔다. 고모부가 직장암 수술을
받는다 고한다. 어차피 한국에 갈 계획이었기에 겸사겸사 가면
누님 힘도 될 것이 아니겠나 해서 때를 맞추어나갔었다. 마침
시누님 댁 조카가 목동에 50평이 넘는 아파트에 기러기 아빠로
있어 그 넓은 아파트에서 호텔이상으로 대우를 받으면서 편히
있다 왔다. 아이들 고모부는 수술이 무사히 잘 끝나서 결과도
좋은 편이다. 시누님께서 그리도 열심히 새벽기도를 드리시며
눈물로 간절히 구하니 하나님께서 어찌 아니 고쳐주시랴. 은혜와
사랑의 힘이다. 고국의 의사들이 얼마나 의술이 좋은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말이다. 수술을 담당했던 아산병원 의사들도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한다.
남편과 내가 돌아올 때 에 큰 동서가 큰형님께 여보 우리는
쓰러져도 아무도 올 사람이 없을 거야 하며 말꼬리를 흐린다.
그 마음이 얼마나 서운했으면 그랬을까, 본의 아니게 어쩌다 그리
되었지만. 난 남편과 약속을 했다.
언제 한국에 가면 큰 형님댁에 머물렀다 와야겠다고,
그래도 큰며느리가 잘 들어 왔기에 집안이 이만큼 든든할 수
있었다. 형님이 존경스럽다. 남편에게도 철든 아내가 돼야
하겠다고 다짐해본다. (9/07)